약 자판기 설치된다고 하자 결사반대하고 나선 약사들

인사이트화상투약기 모습 / 뉴스1


[뉴스1]  음상준 기자 = 정부의 승인으로 10년 가까이 발이 묶여왔던 이른바 한국형 '약 자판기'(화상투약기)가 시범사업을 시작하게 됐다. 심야시간이나 공휴일 등 약국이 문을 닫은 시간에도 약사로부터 원격으로 복약지도를 받으면서 감기약 등 일반의약품을 살 수 있는 시스템이다.


다만 약사단체는 의약품 오투약이나 지역약국 시스템 붕괴 등을 우려하면서 강력 반발하고 있어 화상투약기의 상용화 과정에서 진통이 예상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20일 제22차 정보통신기술(ICT) 규제 샌드박스 심의위원회에서 '일반의약품 스마트 화상판매기'(원격 화상투약기) 등의 규제특례 과제를 승인했다. 서울 지역 10곳에서 3개월간 시범사업을 진행한 뒤 운영 결과를 바탕으로 확대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화상투약기는 개국 약사인 박인술 쓰리알코리아(3RKorea) 대표가 2013년 개발했다. 투약자가 영상장비로 약사와 화상통화를 한 뒤 의약품을 살 수 있다. 처방전이 없어도 살 수 있는 감기약, 소화제 등 11개 효능품목군의 일반의약품만 판매할 수 있다. 화상투약기는 약국 앞에만 설치할 수 있다.


환자가 직접 약을 선택해 살 수 있는 게 아니라 약사가 원격으로 약을 골라준다는 점에서 일반자판기와 성격이 다르다. 의약품 오남용과 안정성 논란을 고려한 방식이다. 약사로부터 복약지도를 받는 만큼 단순한 '약 자판기'로 취급해서는 안된다는 게 개발사 측의 입장이다. 비전문가들이 가정상비약을 파는 편의점보다 안전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화상투약기는 약이 잘못 전달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약사와 환자 대화 내용을 6개월간 보관하고, 근거가 남도록 신용카드나 체크카드로만 결제하도록 했다. 약의 변질을 막기 위해 원격제어시스템으로 온도와 습도를 관리한다.


국내에서 화상투약기가 주목받은 것은 새벽 시간에 응급실에 갈 여력이 없는 환자들 때문이다. 새벽에 응급실을 방문하면 비용 부담이 크지만 화상투약기는 적은 시간과 비용만 부담하면 된다.


쓰리알코리아에 따르면 영국과 독일 등 선진국은 일반약은 물론 전문의약품도 정보통신(IT) 기기와 터치스크린을 통해 복약지도 정보를 환자에게 제공한다. 환자는 약사와 전화상담 후 자동판매기 형태의 '24시간 의약품 조제 서비스'까지 받는다.


박인술 대표는 일반약 편의점 판매가 쟁점으로 떠오른 지난 2011년 10월 화상투약기 개발에 뛰어들었다. 1년 넘게 개발업체를 찾아다니며 설득한 끝에 2013년 4월 견본품을 내놨다. 인천시 부평구 한 약국에서 화상투약기를 시범운영했으나 민원이 빗발쳐 2개월 만에 중단했다.


폐업 위기에 몰린 화상투약기는 지난 2016년 3월 출범한 신산업투자위원회를 통해 기사회생했다. 신산업투자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화상투약기를 규제 완화 대상에 포함했으나, 약사단체 반발이 심했다. 이후 2019년 과기부 규제 샌드백스 실증규제 특례를 신청한 뒤에도 수차례 심의위 상정이 불발되며 어려움을 겪어 왔다.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는 신중한 입장을 견지했다. 약사회 반발을 의식한 것으로 풀이된다.


새 정부의 규제 완화 드라이브를 타고 화상투약기가 시범사업을 시작하게 되면서 가정상비약에 대한 국민 접근성이 높아질 수 있지만 약사들의 거센 반발은 숙제다. 대한약사회는 화상투약기 시범사업을 '약사 말살' 정책으로 규정하고 실력행사를 예고했다.


제2의 편의점 가정상비약 정책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의약품이 약국 밖을 나가면 약사들 수입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또 화상투약기가 궁극적으로 의약품 택배 배달로 이어지는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우려한다. 이럴 경우 동네 곳곳에 있는 약국이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는 게 약사회 시각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시범사업 이후에도 상용화에 필요한 법령 논의 과정에서 첨예한 갈등과 신경전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약사회는 전날 성명을 내고 "전국 16개 시도지부가 단결해 단 하나의 약국에도 약 자판기가 시범 설치되지 않도록 하는 등 어떠한 조건부 실증특례 사업에도 협조하지 않을 생각"이라며 "정부가 추진하는 약사 말살 정책에 대한 전면 투쟁에 나서겠다"고 경고했다. 이어 "약 자판기로 인해 발생할 문제점을 계속 지적하고 심야약국 운영 확대라는 합리적 대안을 제시했음에도 약 자판기 조건부 실증특례 부여 결정이 내려진 데 대해 개탄을 금치 못한다"고 반발했다.


약사회는 화상투약기가 의약품 대면 판매 원칙을 훼손한다는 입장이다. 소비자의 선택권을 역규제하고 의약품 오투약으로 인한 부작용 증가, 개인 민감정보 유출, 신청기업 중심의 영리화 사업과 지역약국 시스템 붕괴 등도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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