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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글리 스니커'로 대박 난 발렌시아가 창업주는 백화점 알바생이었다

발렌시아가 창업주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처음 자신이 만든 제품을 팔며 패피들의 인기를 끌어모으게 된 사연이 공개돼 눈길을 끈다.

인사이트(좌) pausemag, (우) heroine.com


'어글리슈즈'의 선도 브랜드 '발렌시아가'스페인 어촌에서 태어난 창업주 크리스토발 발렌시아


[인사이트] 황성아 기자 = 고급스러운 컬러믹스와 히든힐이 특징인 '어글리 슈즈'의 유행을 선도한 브랜드가 있다.


바로 해마다 개성 있는 컨셉으로 패피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트리플S', '모터백'의 고향 '발렌시아가(Balenciaga)'다.


오늘날의 발렌시아가가 있기까지는 창업주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Cristóbal Balenciaga)의 노력, 재능 없이는 불가능했다.


크리스토발은 지금으로부터 123년 전인 지난 1895년 1월 스페인 북부 바스크 해안의 어촌 게타리아에서 태어났다.


인사이트philippeperzi.com


바느질하던 어머니 돕다 옷에 관심 갖게 된 크리스토발 


그는 어릴 적 바느질하며 가족의 생계를 유지한 어머니를 도우며 어린 나이에 일찍 옷과 패션에 눈을 뜰 수 있었다.


13세가 되던 해에 그는 옷 한 벌을 거뜬히 만들 정도의 실력을 갖추게 된다.


실제로 그해 여름, 크리스토발은 카사 토레스 후작 가족의 별장에 놀러 가서 후작 부인이 입은 드레스와 똑같이 생긴 옷을 만들어 선보였다.


카사 토레스 후작부인은 프랑스 장인이 만든 오트쿠튀르 옷보다 더 꼼꼼한 그의 바느질 솜씨에 감탄했다.


인사이트Vogue / VICTORIA AND ALBERT MUSEUM, LONDON


크리스토발 재능 알아본 토레스 후작, 산 세바스찬 부티크에 추천상류 계층 취향 익힌 크리스토발


크리스토발의 남다른 재능을 알아본 그녀는 곧바로 산 세바스찬에 있는 부티크에 그를 추천해 도제 훈련을 받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가 있었던 산 세바스찬은 스페인 왕실과 부유층의 여름 휴양지로 유명하다.


크리스토발은 자연스럽게 스페인 상류 계층의 문화와 취향을 자연스레 익히며 엄격한 영국식 테일러링을 익힌다.


이후 크리스토발은 지난 1911년 파리 루브르 백화점의 산 세바스찬 지점에서 여성복 테일러로서 경력을 쌓게 된다.


그는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2년 만에 여성 테일러링 워크숍의 수석이 됐다.


인사이트philippeperzi


1918년 '발렌시아가' 첫 번째 컬렉션 공개


크리스토발은 또 우연히 업무 때문에 파리를 여행하면서 파리의 화려한 패션 산업과 오트 퀴튀르 하우스들의 뛰어난 실력을 접하며 영감을 얻게 된다.


지난 1917년 세바스찬에서 쿠튀리에(재봉사)로서의 경력을 시작한 크리스토발은 동업자들의 도움을 받아 1918년 9월 발렌시아가 (C.Balenciga)'라는 이름으로 첫 번째 컬렉션을 발표한다.


이후 발렌시아가는 왕가를 비롯해 스페인 최상류층 고객들 사이에서 인기몰이를 했다.


발렌시아가만의 우아함과 절제되면서도 구조적인 디자인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무엇보다도 크리스토발의 한 치의 어긋남도 허용하지 않는 천재적인 재단 기술은 그 어떤 디자이너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이었다.


인사이트20ml.pl


1950년대 전성기 맞는 발렌시아가 기쁨도 잠시 지나친 '완벽주의' 때문에 기성복 라이선스 사업 포기


구상, 재단, 봉재에 이르기까지 모든 의상 제작 과정을 해낼 수 있는 유일한 디자이너였다.


발렌시아가 하우스는 1950년대 전성기를 맞이해 1968년 폐점하기까지 파리 최고의 쿠튀르 하우스로서 명성을 누렸다.


기쁨도 잠시 크리스토발은 자신의 완벽주의 탓에 대중으로까지 확장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미국 뉴저지의 기성복 생산 공장을 둘러본 그는 자신이 원하는 품질의 옷을 생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기성복 라이선스 사업을 포기해야만 했다.


인사이트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가 1960년에 선보인 '칵테일 코트' / artsandculture


경제적 어려움 겪는 발렌시아가…폐점 선언은퇴 후 심장마비로 세상 떠난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


결국 최고의 쿠튀리에로서의 자신의 스타일을 고집했던 발렌시아가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다.


지난 1968년 크리스토발은 봄 컬렉션 발표를 끝으로 발렌시아가 하우스의 폐점을 선언했다.


은퇴 후 그는 스페인에서 여생을 보낸 후 1972년 3월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입고, 보는 발렌시아가 제품은 어떻게 출시할 수 있게 된 것일까.


크리스토발이 사망한 후 향수 사업을 포함한 하우스 경영권은 모두 조카로부터 독일 기업에 넘겨졌다.


인사이트artsandculture


크리스토발 타계 후 새 컬렌션 출시됐지만 호응 못 얻어


그리고 지난 1986년 발렌시아가는 자크 보가크(Jacques Bogart)가 인수했다.


이후 프레타포르테 컬렉션이 출시됐지만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1997년 니콜라스 게스키에르(Nicolas Ghesquiere)를 크리에티브 디렉터로 영입하면서 예전의 '발렌시아가'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게 됐다.


패션 업계에서 니콜라스 게스키에르는 '발렌시아가의 구세주'라 불리는 디자이너이다. 유년 시절부터 패션에 관심이 많던 그는 보조 디자이너로 일하며 탄탄한 실력을 쌓고 발렌시아가의 수석 디자이너 자리까지 올랐다.


그의 손길을 거친 작품들은 진취적이며 섬세하고 섹시함이 묻어나 패피들이 다시 지갑을 활짝 열기 시작했다. 그는 약 15년간 발렌시아가에 머물다, 루이비통으로 옮긴 것으로 알려졌다. 


비록 '발렌시아가의 구세주'라 불리던 니콜라스 게스키에르는 발렌시아가를 떠났지만 한 치의 오차도 못 견디는 완벽주의자 창업주 크리스토발가 남긴 걸작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명품 브랜드의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아닐까. 


인사이트levelshoes.com